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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단심가 , 업적 과 죽음 고려 마지막 충신의 생애 최후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우리에겐 이방원의 하여가와 이에 답한 시 정몽주의 단심가로 유명하죠.사실 처음에 정몽주는 온건 개혁파로 창왕의 폐위때까지는 이성계에 협조 했으나 고려를 지우고 스스로 새로운 왕이 되고자 하는 그와 갈라서 공양왕과 손잡고 고려를 지키려하나 결국 살해당하죠.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일 ,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이성계와 함께 왜구의 토벌을 위해 전투에 나서 공을 세우기도 수차례일 정도로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신으로써의 모습뿐 아니라 무신으로써도 공을 세운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명나라와 관계가 악화되었을때 외교사절로써 명에가 교섭을 무사히 끝마치고 왔을 정도로 훌륭한 외교관이기도 했죠. 그야말로 다대다능한 능력자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과 중국에 대한 외교부터 시작해 전장에서도 출중한 무신 , 성리학을 처음 들여오고 유교에서도 뛰어나 출중한 제자들을 많이 기르기까지 했으며 백성들도 우러러보던 명재상이였죠.

 


아이러니한게 고려 왕실을 옹립하려고 이성계에 반대하다가 결국 이방원에게 처형당하는 정몽주는 후대로 갈수록 충신의 표본이 되며 평가가 높아 졌는데 조선 건국에 가장 기여한 인물중 하나인 정도전은 평가가 매우 나쁘게 전해지죠.

1 . 정몽주는 책임감이 매우 강했던 인물. 명나라와 조선이 매우 사이가 나빠졌던 고려말 , 모두가 명에 가는 것을 거부해 미뤄지다 명나라의 주원장의 손에 죽을 것을 각오하고 간 한 사신이 있었으니 바로 정몽주죠. 주원장은 정몽주의 용기와 책임감에 감탄해 후한 대접을 해주고 무사히 교섭을 끝마칩니다.

2. 백성을 진심으로 위한 인물. 왜구에 침략강해 포로로 끌려간 고려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가서 담판을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이죠. 그는 사재는 물론 모금운동까지 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다시 고려땅으로 데려옵니다. 정몽주는 매우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고 실제로 고려인들은 물론 일본조차도 그를 존경했다고 전해집니다.

3 . 성리학의 창시자 . 정몽주는 그야말로 천재였습니다. 그는 소과와 대과를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장까지 되었고 사서집주를 해석해 가르치며 성리학을 도입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고 수많은 인재들을 가르쳤습니다.

4 . 왜구격퇴 . 후에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 입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말 당시 이성계가 가장 신뢰하던 전쟁 파트너중 하나로 둘은 함께 여러번의 전투에서 공을 세웁니다.

이렇듯 정몽주는 다대다능 했으며 책임감이 있어 백성들을 끔찍히 아꼈으며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외교와 전쟁에 솔선 수범해 앞장선 훌륭한 인물이죠. 고작? 단심가 하나로 충신으로써만 묘사 될 수 없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충신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필요하다면 개혁에는 찬성하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 왕에 오르려고 하기 전까지는 협력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죠.정몽주는 백성들을 위해 살아생전 많은 새로운 제도들을 고민해 두었으며 사후 그거 죽고 난 후 조선이 초기에 자리 잡으며 그와 비슷한 정책들이 꽤 보이죠. 공양왕을 고려왕에 세운 후 토지를 많이 받았다던가 하는 자산을 좀 챙긴적도 있는것 같지만.


정몽주의 죽음에 대해선 분명하지만은 않은데요.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가 이때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선죽교에서 참살당했다로 알려져 있긴한데 사실 이것도 기록이 완전히 분명하진 않아 유추에 불과 하다고 합니다. 태조실록에서는 낙마한 이성계를 문상을 핑계로 병이 얼마나 깊나 살펴 보러왔던 정몽주를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청했으나 이성계가 이를 반대하자 독단적으로 강행해 대낮에 부하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죽이게 하는데 정몽주가 보이자 조영규가 철퇴를 휘둘렀으나 한번에 맞지 않았고 말을 채찍질해 정몽주가 도망치려하자 조영규가 쫗아가 말머리를 쳐자 말이 넘어 졌고 정몽주가 다시 일어나 도망치려하자 고여 등이 쫒아가서 죽였다고 나오죠. 대낮이라는 사실과 죽인 인물들은 나오지만 그가 죽은 위치가 선죽교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심지어 하여가와 단심가조차 기록에는 분명하지 않죠. 조선 건국에 반대하던 고려의 신하들에게 본보기로 정몽주를 죽여 기를 죽이려는 의미해서 살해 했다는건 확실하지만요.

끝까지 정몽주의 죽음에 반대해 이방원을 비롯한 아들들의 권유를 반대했던 이성계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민심을 잃을 일이 벌어졌기에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효수했죠.( 정몽주를 죽이면 민심이 안좋아질 것을 알기에 주저하는 중이었다는게 정설 )그리고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멋대로 진행한 이방원에게 마음이 상해 이후에 이방원을 세자로 삼지 않고 끝까지 반대한 이유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몽주가 죽자 승려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충신의 시체라며 몰래 수습해 장사를 지냈고 상인들을 며칠간 상점을 닫고 죽음을 애도했으며 심지어 먼 일본에서도 그를 존경해 기렸다하죠. 우현보가 묻어 주었다는 말도 있긴한데 사실 누가 수습해 묻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무조건 충신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던 인물이지만 적어도 그는 백성을 아꼈고 능력이 출중했던 재상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