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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소식들

조선시대 일기 덕후 황윤석 53년간 쓴 책 이재난고

여러분은 일기 쓰시나요?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가운데 굉장한 괴짜로 엄청 사소한 내용들까지 꼬박꼬박 기록하신 괴짜 황윤석이라는 분이 계신데 이분이 쓴 책은 무려 57권으로 죽기 직전까지 53년간이나 매일 같이 쓴 책인 이재난고라는 책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정말 별의별게 다 기록되어 있기로 유명하죠.

이재난고

조선 왕실과 정치에 대한 모든 것이 실려있는것이 ‘ 조선왕조실록 ‘ 이라면 조선 후기 민간 백성들의 모든 생활사들은 한 실학자인 황윤석이 단순히 매일 썼을 뿐인 이 53년간의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너무나 귀중한 사료들을 남겨주고 가신 분이시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임신했다고만 써놓았지 출산 기록은 하나도 없어 불분명했던 조선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의 임신에 대한 사실을 이재난고에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떡하니 적혀 있기까지 합니다.
황윤석 이분은 정말 호기심이 남달라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소식이 들리면 일단 책에다 기록부터 하고 봤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물가는?

  식량 물가
이재난고에 따르면 18세기 평상시엔 물가가 쌀 1섬에 5냥이었고 1768년 보릿고개가 와 1섬에 10냥으로 평년의 두배에 당했고 흉년이었던 1783년 겨울엔 15냥으로 자그마치 세배나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소고기는 한근에 7전 하였다고 기록되었고 닭 한마리는 2전 3푼 , 심지어 국밥 한그릇에 3전 , 담배 한보루에 3전 이었다는 사실까지 적어 놓았죠.현재로 환산할시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고도 하네요.
의료비용
이재난고에 따르면 조선시대엔 의료기술이 미성숙되었기 때문에 의료비용은 굉장히 비쌌다고 합니다.
활인서라고 부르는 지금으로 따지면 국립병원이라고 볼 수 있는 기관에서 종기치료 한번 받으면 8전이었다고 적는등 자세히 나와있는데요.특히 개인병원이라고 칠 수 있는 용하기로 유명한 의원을 찾아가면 종기치료에 3냥이나 받으며 이 3냥이 조선시대 머슴의 15일치 월급 수준이라고 나오죠.
생필품 물가
이재난고에 따르면 따뜻한 옷으로 지금의 패딩이라고 볼 수 있는 양반들이 입던 고급 품질의 누비 솜옷은 4냥이었고 평민들의 일반 누비 솜옷은 반값으로 2냥 정도였다고 나옵니다.머리에 쓰는 탕건의 경우 양반들의 자부심으로 무려 7냥에 달했죠.
조선시대 부동산 값
이제 난고에 따르면 황윤석은 11칸짜리 초가집에서 산다고 하며 자신의 집 가격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는데요.110냥이 집값이고 자신은 전세로 60냥을 내고 살았다고 합니다.(부동산의 역사는 오래되었다..)또한 당시 부유하게 살던 양반들은 보통 15평짜리 기와집에 살았으며 가격은 320냥이었답니다.
조선시대 금리
이재난고에 따르면 18세기 조선의 경우 금리는 월 8%나 되는 미친 수준으로 연으로 치면 150%의 무식한 수치였다고 합니다.재밌는 사실이 황윤석은 실제로 87냥을 빌렸고 10달만에 135냥으로 갚았는데 채권자가 불만을 표시해 쌀 16kg, 콩 24kg , 돈 3냥 , 들기를 1되를 얹어주었답니다.
너무했던 조선시대 인건비 착취
이재난고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5인 가족들의 경우 연봉으로 치면 75냥 정도는 벌어야 최소 생계가 가능했다는데 직업군인인 보병의 경우엔 너무 박봉이라 농사등의 부업을 해야 했다고합니다.

아주 신기한 사실들

이재난고에는 많은 신기한 기록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대표적인게 호랑이 사냥 현상금인데요.충청도 진천과 경상도 상주에서는 호랑이로 인한 인명피해가 말썽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호랑이 현상금으로 몸집이 큰놈 100냥 , 중간놈은 50냥 , 작은놈은 30냥을 걸었는데 하루만에 20마리를 사냥했다고 젹혀 있습니다.(지금은 한국 호랑이는 멸종인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 기록도 이재난고에서 찾아볼 수 있죠.황윤석은 1768년 일기에 과거 시험을 보았고 그 후 다음날엔 일행들과 함께 점심식사로 평양냉면을 시켜 먹었다고 적어 놓았습니다.궁중 요리로 인기가 높던 냉면이 양반들에게도 퍼져 배달까지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우리가 괜히 배달의 민족인게 아니죠.최소로 잡아도 배달음식 역사가 250년은 넘은것입니다.
또 이재난고에는 전북 정읍의 이언복이 산 60냥짜리 자명종을 18살에 구경했고 1761년에는 나경적이 제작한 자명종도 봤으며 , 1774년 임영서를 통해 자명종을 5냥 주고 샀는데 며칠만에 고장나서 직접 수리하다가 포기했다고도 기록했습니다.

  황윤서는 스스로 내보일만한 학문이나 발명품을 내보이지 못했기에 저평가 받는 인물입니다만 그의 폭넓은 지식을 볼때 결코 평범한 실학자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죠.실제로 평범하다면 53년이나 이렇게 꾸준히 일기를 기록하지 못했을 거고 특히 그렇게나 방대한 분야를 다룰 정도면 지식이 여러면에서 엄청 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정도로 멋지고 귀중한 정보들이 세세히 담긴 일기장을 남겨주셨는데 대단합니다!